마지막 선물을 준비하는 한국 탁구 영웅들

크기 40㎜, 무게 2.7g의 작은 공 하나가 세계를 들썩이게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작은 통일을 이루게도 하고, 때론 외교관 역할도 하는 탁구공이 이제 올림픽 메달의 주인공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중국이 쳐놓은 탁구의 철옹성이 올림픽 무대에서도 건재할지, 아니면 이변의 드라마가 녹색테이블에서도 연출될지, 작지만 위력적인 탁구공만이 알고 있을 변화무쌍한 승부가 이제 곧 시작된다.

탁구 연습 장면 탁구 연습 장면2
전설이 돼버린 한국탁구의 세계제패

한국탁구가 세계무대를 호령하던 때가 있었다. 1973년, 이른바 ‘사라예보의 기적’ 으로 불리는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첫 우승을 시작으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 탁구의 전성기였다. 한국탁구는 86년 아시안게임 당시 5시간이 넘게 진행된 중국과의 단체전 결승전 우승과 함께 남자단식 우승으로 유남규(현 남자대표팀 감독)를 대회 2관왕에 올려놨고, 88 서울올림픽 현정화-양영자 조의 우승과 유남규의 남자 단식 우승까지 국민들을 울고 웃기며 한국스포츠의 대표적인 메달종목으로 자리잡았다. 그 당시 동네마다 탁구장이 있는 것은 물론 탁구장마다 손님들로 붐비고,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에 짬을 내 탁구를 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니 탁구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듯하다.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때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해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르고, 93년 현정화의 예테보리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의 낭보가 들릴 때까지만 해도 한국탁구는 스타계보를 이어가며 메달의 명맥도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중국탁구가 세계탁구를 주도하면서 한국탁구는 중국을 조금 위협할 정도의 많은 나라들 중 하나가 됐다. 그래서 2004년 세계최강 중국의 왕하오를 이기고 따낸 유승민의 아테네올림픽 금메달은 ‘기적’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세계 탁구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던 사건(?)이었다. 한국탁구는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기적’을 노래하고 싶다. 올림픽무대는 객관적인 전력과 상대전적이 무의미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의 분위기와 흐름이 어느쪽으로 향하느냐가 메달을 색깔을 바꾸는 만큼, 한국 탁구대표팀은 올림픽이 주는 중압감과 중국이 가질 ‘당연히 우승’이라는 부담감을 이용해 다시 한번 철옹성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 이유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 사진도현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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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대표팀의 무기는 그들의 ‘이름 석자’
오상은, 주세혁, 그리고 유승민.

탁구 남자대표팀

런던에서 한국탁구를 대표할 남자대표팀은 10여년간 한국탁구를 대표했던 3명의 선수로 구성됐다. 최고참 오상은, 수비의 달인 주세혁, 그리고 탁구신동 유승민이다. 누가 뭐래도 한국탁구를 대표하는 3인방이지만 유승민의 합류는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이미 세계탁구계에 노출 될 만큼 돼 있는 오상은, 주세혁이 출전권을 획득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크호스가 돼줄 신예를 대표팀 명단에 넣고 싶은 것이 유남규감독의 계획이었다. 위궤양이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 심각하게 고민을 했으나 큰 대회의 중압감을 견딜 수 있는 선수인 유승민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남규감독은 아쉽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런던올림픽 감독의 임무를 생각하며 큰 대회에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유승민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선택했던 것이다.

유남규 감독과 유승민 선수

대신 유승민에게 약간의 변화를 가했다. 포핸드로 많이 움직여 치는 유승민은 체력적 소모가 클 수 밖에 없고 이미 노출돼 있는 이 기술은 올림픽무대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탁구대에서 많이 안 떨어지고 높은 타점에서 짧은 스윙을 하는 전술로 변화를 꾀했다. 유승민 같은 선수에게 상대가 좋은 기회를 줄리 없기 때문에, 마치 복싱에서 짧은 쨉을 치다가 큰 카운트펀치를 날리듯, 짧은 스윙으로 랠리를 하다 빈틈이 보이면 강하게 공격하는 전술로 유승민을 변화시켰다.

한국남자탁구대표팀의 장점은 누가 뭐래도 ‘경험’이다. 10년 이상 한국탁구의 정상에 섰던 힘, 세계탁구계에서 중국을 위협해왔던 저력, 그리고 그들의 ‘이름 석자’가 있기에 이들은 여전히 강한 존재들이다. 유승민 역시 자신들의 경험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말한다. “힘든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경험이 나오는 것이다, 이번 중국대표팀은 경험면에서 우리에게 밀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다”며 올림픽에 임하는 당찬 각오를 보였다.

건재한 여자대표팀 김경아, 박미영
히든카드 석하정

탁구 여자대표팀

여자대표팀은 맏언니이자 세계최고의 커트 수비수 김경아, 수비형 절친 후배 박미영, 그리거 귀화선수 석하정으로 런던올림픽에 승부수를 띄웠다. 여자대표팀 역시도 김경아와 박미영은 세계탁구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 따라서 히든카드가 필요했다.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얼굴, 중국탁구와 맞설수 있으면서도 노출이 많이 돼 있지 않은 선수, 그래서 여자대표팀 강희찬 감독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카드가 바로 석하정이다. 경기경험이 적다는 단점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장점으로 바꿔 승부를 볼 생각이다. 석하정의 포핸드, 백핸드 파워가 중국대표와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는 점도 강희찬 감독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큰 요인이 됐다. 상대국가에 따라 변화를 준다는 전제 하에 단체전은 석하정 단식에 이어 김경아 단식, 김경아와 박미영의 복식, 석하정의 단식, 그리고 박미영의 단식 순으로 경기에 임할 계획까지 이미 세워놓았다. 석하정이 첫 단식을 무난하게만 잡아준다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김경아 단식이 기다리고 있고, 이어 더 단단해진 김경아,박미영 조의 복식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체력과 컨디션만 유지가 된다면 세계최강이라는 중국의 벽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아닐 것이다. 강희찬 감독이 이렇듯 큰 꿈을 꿀수 있는 이유는 김경아의 건재, 아니 그 이상의 발전 때문이다. 베이징올림픽이 마지막 올림픽일지도 모른다던 세간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김경아는 새롭게 태어났다. 이제 세계최고의 수비기술을 가지고도 공격기술이 부족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던 김경아가 아니다.

김경아 선수 박미영 선수

자신이 자랑하는 기존의 수비 탁구에 공격드라이브를 장착한 게 주효했다. 커트를 하다 드라이브를 하는 세계적인 추세에도 발을 맞췄다. 그러면서 전술적인 변화도 꾀했다. 공을 깎아 내리며 스핀을 잔뜩 먹인 수비를 한다 하여 '깎신'으로 불려온 김경아가 당연히 '깎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상대에게 드라이브로 공격하며 기존과는 다른 공배합으로 경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4월 스페인오픈 단복식 2관왕에 이어 칠레오픈 여자단식에서도 우승하며 생애 첫 여자단식 2연속 우승 기록까지 작성했다. 서른다섯의 세계 수비탁구의 레전드, 김경아는 지난 10여년간 세상에 알려진 '김경아 탁구'를 버리고 이렇게 변신에 성공했다. 새로운 ‘김경아 표 탁구’가 런던올림픽 무대에서는 어떤 기적들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석하정 선수 강희찬 감독
세계탁구의 대세는 누가 뭐래도 중국의 만화탁구

중국은 탁구를 하는 모든 나라의 공공의 적이다. 세계정상을 가는 길목에는 언제나 중국이라는 벽이 있다. 중국의 벽은 더욱 높아졌고, 독주는 더욱 심해졌다. 서브를 커트하는 시대는 갔다. 아무리 높은 서브로 공격해도 손목의 힘을 이용해 백핸드로 넘기는 게 요즘의 탁구다. 그 흐름을 주도하는 나라가 중국, 더 엄밀히 말하면 중국의 새로운 탁구황제 ‘장지커의 탁구’다. 스피드와 힘을 겸비한데다 초구 부터 회전을 돌리는 만화에서 나올 법한 공격적인 탁구로 왕하오를 꺾고 세계선수권을 제패했다. 당시 23세로, 옷을 찢으며 우승의 감격을 표현한 세리모니는 장지커의 스타성과 대범함을 대변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세계남자 탁구의 흐름을 선도하는 장지커지만 세계1위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 국제탁구연맹이 발표한 5월 세계랭킹 기준으로 1위는 마롱, 2위가 장지커, 3위 왕하오, 4위 쉬신, 5위 마린, 1위부터 5위까지가 모두 중국선수들이다. 여자부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선수와 같은 힘과 발의 움직임으로 세계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중국선수들이 상위권에 올라있다. 딩링, 류스원, 궈얀, 리샤오샤, 궈예 순으로 1위부터 5위까지가 중국선수들의 이름으로 나열돼 있다. 그런데 5월 현재 세계 남자1위 마롱과 여자 1위 딩링 모두 개인전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지난해 6월 랭킹으로 개인전 올림픽 출전권이 주어졌기 때문인데, 중국의 선수층이 얼마나 두터운지, 세계정상권 선수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다. 그리고 그들이 올림픽 탁구 전종목 금메달을 목표로 하는 것이 전혀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탁구 대표팀 연습 장면
중국의 ‘부담감’을 역이용하라.

“아무리 철옹성 같은 중국탁구라 해도 분명 빈틈은 있을 것이다. 특히 기구를 갖고 하는 것에 ‘완벽’은 있을 수 없다. 탁구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한국탁구가 노려야할 틈새다. 게다가 중국은 한국이 양궁이나 태권도에서 느끼는 ‘당연히 금’이라는 부담감을 탁구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초반에 중국과의 점수차가 크게 나지만 않는다면 후반에 갈수록 중국이 오히려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이길 가능성도 생긴다는게 탁구대표팀의 계산이다. 유남규감독은 “그들도 인간이기에 우리가 3 대 3, 6 대 6, 7 대 8 이런 식으로 따라가면 주면 부담감을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에게 분명이 기회가 온다, 그래서 처음부터 승부를 걸 생각이다”며 중국 상대 전략을 살짝 내비쳤다. 여자팀 강희찬 감독도 같은 생각이다. “한국탁구는 승부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왔기 때문에 힘과 기술에서 중국에 가까이만 가준다면 해볼 만하다, 따라서 최대한 중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압박해 승부수를 띄우겠다”고 밝혔다.

이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처음부터 경기결과가 나올때까지 끈질기게 승부를 걸어야만 가능한 전술이기에 유남규감독은 이기기 위한 훈련 방법 찾기에 몰두했다. 그 결과 강구해낸 훈련이 듀스게임이다. 하루 훈련의 마무리는 듀스게임으로 하되 패하는 선수에게는 혹독한 체력훈련의 벌칙이 가해진다. 사이클을 5분안에 1km를 타야하는 조금은 가혹한(?) 벌칙 탓에 선수들은 듀스게임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독기를 보일 정도다. 경기와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유남규감독의 작전이 선수들에게 집중력과 체력을 함께 키우게 했다.

탁구대표팀은 모든 것을 최상에 맞춰놓고 올림픽 경기에 임할 생각이다. 그래서 태릉선수촌 개선관 지하를 떠나 런던올림픽 현지의 경기장처럼 지상에, 천정이 높고 좀더 넓은 곳을 선수촌 한켠에 마련해 이사를 했다. 라켓 무게 그램 수까지 맞춰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 현지의 공기저항과 그로 인한 공의 소리, 그리고 경기장 분위기까지 최대한 갖춰주고 싶은 탁구인들의 소망이 함께 한 보금자리다. 이곳에서 한국탁구의 영웅들은 탁구인들에게, 후배들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Posted by Mr크리스티앙 :